빛 아래 서는 은혜 글 김선아(11. 4 말씀 묵상)
익히 알려진 대로, 아이들의 감정은 모두 받아주되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육아 지침이 있어요. “그렇게 느껴졌구나, 네 마음을 말해주다니 고맙다. 그러면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?”라는 도식으로 아이를 대하면, 아이는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통해 건강한 정서를 갖추며 자라난다고요.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 일어설 수 있다지요. 그런 것처럼‘그래, 그럴수도 있지’라는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넉넉한 마음.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한계 없이, 차별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, 받아주는 다정한 마음을 품어가는 것이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에요.
그런데 ‘그래, 그럴 수도 있지.’라는 마음을 내가 품었을 때는, ‘그러면, 어떻게 해야 할까?’라는 다음 계단이 없는 포기였다는 걸 알았어요. 그리고 그런 방관이 스스로를 향하면 흠결 없어야 할 신앙관에 군더더기가 붙게 된다는 것도요. ‘바쁘다 보면 그럴 수 있지. 살다 보면, 그럴 수 있지. 그래,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말이 된다.’돌아보니 어느새, 그런 유연함 속에 나의 매일이 조금씩 누룩에 잡아먹히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. 세상에서 말이 되는 것들, 세상의 지혜가 섞여드는 신앙관과 더 광범위한 포용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세상의 태도에 휘둘릴수록 나의 삶에도 핑계가 붙고, 군더더기가 붙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흠결 없는지를 점검하기가 부끄러워졌습니다.
그러니 이제, 조금씩 내버려 두었던 것들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더 날카로운 칼이 필요하더라고요. 오직 순전함과 떡만이 그렇게 날카로운 생명의 칼이 되리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. 무엇도 감출 수 없는 밝은 빛 되시는 우리 주님 앞에 오롯이 설 때, 썩어있는 내 영혼의 편린을 보게 되는 것이야말로 은혜의 시작이라는 이 말씀 앞에 그저 감사히 엎드리길 원합니다. 내가 무엇도 감출 수 없음을 깊은 좌절과 선선한 포기의 이유가 되는 내 삶의 쓴 뿌리들 앞에서 변명하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도록 용기롭기를. 지금 이 자리에 엎드릴 수 있는 이 하루를 감사하며, 오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이르는 구원을 더 강하게 믿기를 바랍니다.